생리예정일로부터 7일이 지난 날 저녁이었다. 약국에 들러 임신테스트기를 사,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 뒤 결과를 기다렸다. 테스트기는 흐릿한 지그재그를 그리다가 곧 선명한 두 줄이 되었다. 생리예정일이 5일이 지날 때 약간의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임신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니 아찔했다. 앞으로의 모든 일정이 무너지고 지나쳐온 작은 신체적 징후들이 불길한 저주의 복선처럼 다가왔다. 저녁약속이 있어 빠르게 파트너에게 전화로 임신사실을 알리고 외출에 나섰다.
친구와 만나 식사를 하며 맥주를 마셨고 임신사실을 알렸다. 친구는 잠시 표정이 굳는 듯 했지만 곧 웃는듯한 얼굴로 정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며 기분을 달래주었다.
다음 날 파트너와 함께 가장 가깝고 큰 병원으로 향했다. 수술을 위해 아침부터 금식을 한 상태였고, 방문목적에는 일단 "임신여부 확인" 을 작성했다. 여의사에게 진료를 받도록 부탁하고 진료를 기다렸다. 진료실에서 초음파검사를 하며 주수와 자궁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임신초기이기때문에 산부인과에서 쓰는 M자의자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보지에 초음파 기기를 넣어 검사했다. 초음파영상을 봐도 아주 작은 콩알같은 동그라미가 보일 뿐이었다. 5주차 3일 가량 된 크기라고 들었다. 아기가 될 부분의 작은 점과 영양분이 될 부분의 흐릿한 선 같은게 보이면서 문득 두렵고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섹스를 했을 뿐인데, 인간이 될 수 있는 콩알같은 게 멋대로 자궁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임신때문에 오른쪽 난소에 피가 몰려있고 자궁에 염증이 생긴 것 외에는 배아도 나도 건강에 큰 지장은 없다고 했다. 혹시 모르니 자궁경부암 검사를 하는것이 좋겠다고 하며 나를 "아기엄마"라고 불렀다. 커튼 밖에서 기다리는 파트너도 당황하고 멍한 상태인 듯 했다. 담당의에게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 말하자 임신중절수술을 하는 다른 의사에게 검진을 진행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상담실로 이동해 임신중절수술의 내용과 이후관리 부작용 등에 대해 안내를 받고 "무조건 현금"으로 병원비를 수납해야 한다는 안내 또한 받았다. 아직까지 국내에선 임신중절수술의 내용과 금액을 유선상 혹은 온라인 상으로 공개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다른 수술과 달리 금액이나 관리 내용의 병원별 비교 같은 건 할 수 없었고, 일단 빠른 수술을 받고 싶었기 때문에 동의했다. 현금수납을 하여 병원과 개인의 의료기록 양측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실에서 나와 임신중에 단단하게 닫히는 자궁을 부드럽게 하기 위한 약을 먹었다. 다른 의사분에게 다시 진료를 받으며 자궁경부암검사를 했고, 중절수술에 대해 다시한번 안내를 받았다. 보호자의 동의가 있었는가 수술의 내용에 대해 동의하는가 등등의 서너개 질문에 답하고 빈 분만실로 이동해 수술용 바지로 갈아입고 항생제 진통제 등이 들어간 수액을 맞으며 대기했다. 파트너는 수술을 기다리는 나를 덜 불안하게 하려고 재미있는 글을 읽어주었다.
수술 예정시간은 12시 40분이었고 정해진 시간보다 조금 빠르게 수술실로 이동했다. 수술실에 들어가는 길목 바로 앞에 신생아실이 있어 태어난지 얼마 안된 빨갛고 작은 인간들이 울거나 자고 있었다. 조금 당황한 기분이 되었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수술준비가 분주했다. 잡담을 하며 집기등을 옮기는 간호사들 사이로 지나 굉장히 흉하게 생긴 M자형 결박의자에 누웠다. 수면마취 중에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손발을 묶는다고 했다. 손발을 봉한다고는 했지만 접착식으로 된 결박부가 헐거워 손이 쉽게 빠졌다. 담당의가 수술실로 들어왔고, 나는 밝은 수술실 조명아래 보지를 시원하게 드러내놓고 커튼 아래로 보이는 의사의 실루엣을 보고 있었다. 수술을 준비하는 소리를 듣다가 어느새 의식을 잃었고 눈을 뜨니 회복실에서 기저귀같은 것을 차고 이불을 덮은 채로 누워있었다.
수면마취가 덜 풀려서 여기가 어디냐 이게뭐냐 같은 소리를 하다가 잠들었었다고 했다. 회복실에서 몸을 추스리고 옷을 입고 파트너와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수술 후에는 하혈하는 것처럼 피가 나오고, 자궁과 비뇨기계 그리고 소화기계가 불편할 수 있다고 했다. 약은 약 4정정도 하루 세번, 철분제도 함께 먹어야한다. 출산 후와 비슷한 관리를 해야 이후 회복의 정도가 다르니 충분한 휴식과 체온유지를 해야한다고 했다. 수술 전까지는 훨씬 가벼운 수술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피부과에 다녀오거나 점을 빼는 것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짐작보다는 큰 수술이었고 생각보다는 작은 수술이었다.
임신중절수술을 겪고나서 더욱 확고해진 생각은 계획되지 않은 임신으로 자궁에 자리를 잡은 배아는 종양이나 암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내 인생과 하루와 일주일과 한달 혹은 서너달의 계획을 흔들고, 체력을 소진하고 예상치못한 큰 지출을 하게된다. 내 신체를 내가 온전히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좌절감이 컸다. 동시에 더욱 가벼이 여겨져야할 수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중절수술은 보험처리가 되지않는다. 현금으로 1백여만원 가량을 한번에 지불해야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부담이다. 이 부담을 여성 개인의 몫으로 두면 여성의 삶은 더욱 바닥을 향할 수 밖에 없다. 청소년 여성, 빈곤층 여성, 장애 여성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로 닥쳐 올 것이다. 과연 내가 파트너가 없는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면 이렇게 빠르게 수술을 받을 수 있었을까?
피임도 여성에겐 완벽한 예방이 되지 못한다. 피임약과 콘돔으로 무장해도 말도 안되는 확률로 임신은 되어버리고 만다. 미레나 등의 피임시술 또한 신체적 부담이 따르며, 금액을 충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상담조차도 망설이게된다.
여성의 자유를 위해서, 여성의 신체결정권을 위해서 피임과 임신중절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사회적 제도 확립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는 사회는 여성을 언제까지나 임신이라는 족쇄로 사회의 가장 하위층에 가둬두려는 사회일 뿐이다.
+아직 한번의 검진을 남겨둔 임신중절수술 유 경험자로서 이 글을 남겨둔다.
+도움이 될만한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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